오짜전 - 고성북

모두가 잠든 새벽 세 시에 부엌 냉장고를 뒤지는 사람은 이 정도의 글밖에는 쓸 수가 없다. 이 정도의 글을 쓴 사람에게 나는 항상 감사한다. 그가 좀 멍했었기 때문에, 그가 잠깐이라도 한눈을 팠기 때문에, 그가 제대로 정신 차리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다. 나는 오자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작가의 날카로운 눈을 피했고, 교정 경력이 30년이 넘는 베테랑 편집자의 눈도 피했다. 나는 세상에 나왔지만 어떻게 나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조차도 모른다. 그냥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다. 억세게 운이 좋았던 것이다. 인쇄소를 갓 빠져 나온 나와 내 수십만 동기들은 책 속에서 나란히 앉아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모두 잉크 비린내를 솔솔 풍긴다. 처음에는 그게 세상의 냄새려니 했다. 드디어 누군가 손에 들어간 우리는 앞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차례가 가까워짐을 느끼면서 설레고 있었다. 사람들이 책을 샀다는 것이 반드시 그 책을 다 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이해할 수 없는 풍문이 들리기도 했으나 믿지 않았다. 비교적 얇은 책에 들어가 있었던 나와 내 동기들은 곧 우리 순서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모두 조금이라도 더 눈에 띄는 글자가 되기 위해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활자로 태어난다면 누구나 한 번쯤 누군가의 뇌리에 박히는 꿈을 꾼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일단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오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 번씩은 더 봐주기 마련이니까. 일종의 게릴라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연히 재미있는 오자가 된다면 그 누구보다도 깊숙이 머릿속에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꽤나 시끄러울 줄 알았던 그날 밤은 의외로 조용했다. 끝끝내 내가 앉아있던 페이지는 펼쳐지지 않았다. 한 번 덮어진 책은 다시 열릴 줄을 몰랐다. 주인의 흥미를 좀 더 북돋우지 못한 앞 페이지의 동기들을 욕하기도 하고, 참고도서 면이나 겨우 면한 페이지에 앉게 된 자신의 자리 운을 탓하기도 하며 지내던 중이었다. 거의 단념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손의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페이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본능적으로 나는 말로만 듣던 가을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은 적중하였다. 책의 계절인 가을이 온 것이다. 그러는 사이 바로 앞 페이지가 펼쳐지더니 드디어 나를 무겁게 누르고 있던 페이지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그림자가 걷히면서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이 비치는 것이 흡사 개기일식의 그것과 닮았다. 아! 이것이 가을 하늘이구나! 이 최고의 장을 보려고 그동안 고생의 시간이 있었던 것이구나!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는 것도 잠시, 인제 곧 선택의 순간이다. 최대한 독자의 눈에 띄게 간택을 바라는 새색시처럼 곱게 앉았다. 그런데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새근거리는 콧구멍 두 개, 쩍 벌어진 입구녕 하나가 전부다. 당황해서 위를 보고 있는데 질펀한 국물이 정수리 위에 떨어진다. 침이다. 크기로 보나 양으로 보나 맞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배부터 입수하는 다이빙을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물이라는 것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내 몸이 흐물흐물 녹아 내리더니 그대로 눌러앉아 버렸다. 좀 어찌해보려 책 주인이 황급히 침을 훔쳐낸다는 것이 괜한 살갗만 벗겨 내고 말았다. 찢어지는 아픔에 깨어나 보니 눈앞이 뿌옇다. 살갗도 주름이 져 있다. 희지도 검지도 않은 것이 정체불명이다. 한숨 더 자서 이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잊어버린다면 어떨까? 나는 이제 문자도 오자도 아니다. 의미불명이다.